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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51018 월동 준비

by 셀라지기 2025. 10. 19.

월동 준비

 

휴일 아침, 평소보다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거실에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아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에도 벌써 김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도 소매를 걷고, 배추를 자르고, 무를 썰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김장만으로도 하루가 벅찰 텐데,
화분도 갈고 싶다고 한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아마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손을 쉬게 두지 못하는 듯했다.

 

점심 무렵,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나선 아내가
두 번째 빨래가 돌아갈 즈음에야 돌아왔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산책이었다.
혹시 내게 말하지 않은 걱정이 있는 걸까, 마음이 쓰였다.

 

오후엔 절인 배추를 헹궈 김치를 담그고,
절인 무로 깍두기도 만들었다.
하루 종일 손이 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 손끝엔 이상할 만큼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아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이 너무 바빴잖아요.
그때 대화를 많이 못 나눈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워요.”
그 말 속엔 긴 세월의 결핍이 배어 있었다.

 

“나는 늘 시키는 일을 성실히 해왔던 것 같아요.
교수님이 시키면 최선을 다했고,
그 덕에 인정도 받고 성장도 했죠.
그런데 이제는 달라요.
이제 내가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이끌어야 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니까요.”

 

아내의 고백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묻어 있었다.
“이제서야 진짜 연구자가 된 것 같아요.”
그 말 속엔 새로운 세계의 문턱에 선 사람의 떨림이 있었다.

 

아내는 지금 성장점 앞에 서 있다.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빠뜨린 게 없는지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을 다듬고 계신다는 것을.

 

아마 앞으로 3년,
아내는 눈에 띄게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으로 서 있을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성장점에 도전받고,
다시 배우고 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얻는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오늘 김장으로 겨울을 준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시간은
아내가 인생의 월동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 그 옆에서 배추를 버무리며 다짐했다.
앞으로도 그녀의 월동 준비를 잘 도와야겠다고.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 앞에 있는 일을 알게 하시리라.”
- 역대상 22:12


주님, 아내의 길을 인도하소서.
연구의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시고,
그 손으로 이룰 모든 일 위에
주님의 평안과 확신을 더하소서.
그리고 제가 그 곁에서 믿음의 동반자로 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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