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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늘(주간 메시지)

창세기 9:18-29 방주 안에서 배운 시선, 방주 밖에서 잃어버린 시선

by 셀라지기 2025. 12. 22.

창세기 9:18-29 방주 안에서 배운 시선, 방주 밖에서 잃어버린 시선

 

방주 안에서 배운 시선, 방주 밖에서 잃어버린 시선

창세기 9:18-2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는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었다 입니다.  

마지막은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부분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고는 성경은 믿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칩니까?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분들은 아무리 입술로 믿는다고 고백해도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 부인 즉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상식이 깨어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이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바르게 듣기 위해서는 

먼저 방주 안의 상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피해, 방주에서 보낸 시간은 1년 17일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홍수는 40일 동안 윗물과 아랫물이 터쳐지면서 일어나, 온 세상을 물에 잠겼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이 40일간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 이후로도 약 11개월간을 방주에서 더 생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로 노아가 있었던 방주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 방주 안의 시간은 구원의 기쁨의 시간보다는, 견딤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방주 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짐승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짐승들의 먹이를 주는 일을,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가득한 방주 안에서 11개월간 이어간 것입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노아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이를 읽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노아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여겨졌던 회사 생활, 꿈을 향한 계획들이…

어느새 노아의 방주 안과 같이, 어려움이 가득한 곳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때 노아를 통해 받아야 할 음성이 있습니다. 

처해진 상황이 아닌, 그 상황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러한 상황에 놓였는가?’에 대한 질문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놓쳤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심판의 목적이 끝났음에도 

지상에 물이 오래 남게 하여,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짐승들이 가득한 방주 안에서, 

천정에 열려 있는 단 하나의 창을 통해,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기사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 

요셉의 종살이·옥살이, 

다윗의 도망자 세월 등 역시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상황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직장이나, 학교, 친구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라 여겨졌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자리가 방주 안 같은, 견딤의 시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의문은, 우리의 시선이 땅을 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이 끝났는데도, 

노아를 방주에 오래동안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짐승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더 큰 은혜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방주의 구원 이후에도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 실패의 순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했다면,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노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아는 자신의 손주인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찾자, 

아담이 자신이 벌거벗었음으로 숨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즉 성경의 벌거벗었음은, 옷을 벗은 것을 넘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어떤 메타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은혜가 아닌, 자기 노력과 열심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다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노아가 땅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홍수 이전도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짓었습니다. 

방주에서 내린 후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세상 모두가 망한 그 상황에서도 

노아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가, 그의 시선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서도 노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훈련을 지속했습니다. 

 

그때 노아는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었고, 

그 어떤 역경을 만나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미래와 희망을 누렸습니다.

 

그 노아가 오늘 말씀에서, 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농부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의 시선이 땅으로 향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벌거벗게 되었던 것 같이, 

그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벗은 상태입니다. 

아담은 선악과 이전에도 벌거벗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이후에는 벌거벗었음에도 수치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부모에게 속한 어린아이와 같이, 부모님 아래서 염려, 걱정 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자신에게 평안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옷을 벗은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땅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시조인 아담은 선악과를 넘어졌습니다. 

두 번째 시조인 노아는 포도주에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스스로 너머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예수를 바라봐라!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살점이 뜯기는 채찍에 맞으셨는가?

왜 그 의로우신 예수님이 처참하게 수난을 당하셨는가?

왜 그 선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는가?

 

아담도, 노아도, 요셉도,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그들과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넘어졌음에도 예수를 바라보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잘 못만 바라보며, 

그 잘 못을 크게 여겼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선택의 실패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지금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아닌, 심판에 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10번도 넘게 원망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들어 올렸고, 

누구든지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심이 가득해도, 놋뱀을 보면 살았습니다. 

거의 안 믿는 상태에서도, 슬쩍 본 사람도 살았습니다. 

슬쩍 본 것에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노력, 의로움과 상관없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함이 아닌,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까?

가나안은 히브리어로 낮아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저주는,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의 옛 이름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즉 우리가 완전히 낮아질 때,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주는 저주임과 동시에 은혜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저주를 예수님을 십자가로 감당하시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에 깬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저주한 것이고, 

자신에게 오직 약속된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상황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지금도 세상을 경영하고 계신 하나님입니까?

 

오늘 말씀과 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를 방향해는 홍수가 그치고, 

우리를 가로막는 홍해가 갈라지며, 

우리를 위협하는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우리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예수님을 바라보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는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누리는 우리가 되길 축언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기대하는 우리의 한주가 되게 역사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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