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가는 돈을 주었다. 회복을 말하며, 손에 쥐어준 건 한 장의 쿠폰이었다. 그 쿠폰은 15만 원이었다. 그것은 분명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묻고 싶다. 국민은 쿠폰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문제다. 이 질문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믿고 고백해 온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하나님은 인간을 계산의 단위로 보시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을, 그 숨결을, 그의 오늘을 보신다. 그런데 국가는 지금 국민을 한 장의 쿠폰으로 환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본질을 묻게 된다. 돈은 단지 지불 수단인가, 아니면 오늘날 이 사회가 말하는 유일한 소통의 언어인가? 그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투표가 있고, 지지와 철회가 있다면,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지표 없는 시장 안에서 어디에 계신가?
구조를 외면한 위로는 또 다른 폭력이다
정부는 정책을 발표하며, 민생을 회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너무 얇고 너무 가볍다. '회복'이라는 단어 앞에는 반드시 '관계'와 '정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소비쿠폰은 ‘회복’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고, 정의의 구조를 다시 세우지도 않았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15만 원으로 무엇을 회복하라는 것인가?” 고립된 노인은 이 쿠폰을 쓸 수 있는 인터넷이 없고, 병든 몸은 골목 상권까지 갈 수 없으며, 저임금의 청년은 이 돈으로는 단 하루도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예수께서 성전 앞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던 과부를 보며 말씀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마음과 헌신의 전부를 보셨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반대로, 국가는 마음이 아니라 액수만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여주기 위한 정책, 구조를 외면한 복지, 절차로 소외된 약자.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예수께서 가장 분노하셨던 종교 권력의 형식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회복이란 이름 아래, 또 다른 배제가 일어나고 있다.
위로는 구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회복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단지 감정적인 위로나, 일회성 도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구조와 질서를 선포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국가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을 단지 쿠폰 수령자, 수치로 환산되는 소비자로 대하지 말고, 이름을 가진 생명으로, 가정과 공동체의 중심으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정책은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
쿠폰으로는 국민의 상처를 설득할 수 없다. 회복은 돈의 액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신뢰의 구조에서 온다. 정부가 지금 진짜로 회복을 원한다면, 단기적 시혜보다 장기적 정의를, 숫자보다 관계를, 광고보다 겸손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은, 이러한 시대적 기류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 물질을 수단으로 삼되, 목적은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 소비의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식을 증언해야 할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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