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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늘(주간 메시지)

창세기 11:1-9 하나님이 인간의 협력을 막은 이유

by 셀라지기 2026. 1. 20.

하나님이 인간의 협력을 막은 이유

 

 

하나님이 인간의 협력을 막은 이유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고,
목적도 같았으며,
기술도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협력했고,
연합했고,
실제로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중단시키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장면을 보며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인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왜 하나님이 막으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찾게 됩니다.

 

 

 

 

본문은 홍수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동방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 정착합니다.

 

그들은 다시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탑을 쌓습니다.
홍수가 와도 잠기지 않을 높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랜드마크.

 

안전을 확보하고,
중심이 되고,
흩어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식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역량을 키우는 삶.

 

창세기 11장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대화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우리”, “우리”뿐입니다.

 

언어는 하나였으나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겉으로 보면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며, 성공적입니다.

 

그러나 시작의 목적을 잃은 연합은
반드시 혼돈과 공허로 향합니다.

 

목적을 잃는 순간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존재를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죽지 않기 위해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목표를 잃은 공동체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지난번엔 네가 했으니,
이번엔 내가 해야지.”

 

이것이 혼돈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예견 가능한 결과지만
인간은 늘 눈앞의 이익을 따릅니다.

 

이것이 선악과입니다.

 

좋아 보이지만
반드시 죽이는 선택.

 

왜 그렇습니까?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묘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반석 위에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곁에 있는 가족의 마음을 살피고,
직장에서 동료의 마음을 살피고,
주어진 일에 몰입하며
현재를 사는 것.

 

과정을 즐기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에 둔 반석 위의 삶입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의 진짜 동기가 드러납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늘에 닿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흩어지라 하셨지만
그들은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바벨입니다.

 

 

 

 

이 장면은
놀랍게도 오늘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교회는 예배당에 모이는 일에만 힘씁니다.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
바벨을 쌓습니다.

 

해답은 단순합니다.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서는 것.

그러나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재정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요구하신 원리는 분명합니다.

십일조.
그중 10%는 교역자 몫,
45%는 교회 안,
45%는 교회 밖.

 

이 원리만 지켜도
교회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말합니다.

“너무 적다.”
“현실적이지 않다.”

 

그 순간부터
교회는 기업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반석 밖에서 울부짖는 기도를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은혜입니다.

 

인간의 죄가
연합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도
이해되지 않는 사람,
맞지 않는 상황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벨은 묻습니다.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디까지 순종할 수 있는가?”

 

바벨은 자기 이름을 세우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연합은
반드시 혼돈을 낳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선 자들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구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돌아오는 한 주간,
자기 유익이 아니라
반석 위에서
구름기둥을 좇는 삶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이름을 세우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불안한 미래로 염려하는 것보다
오늘 주신 자리에서 주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반석 위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을 다시 배우게 하시고,
보내진 현장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바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구원의 이야기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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