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세 개의 나무가 세워졌고, 그 중앙에 예수가 매달렸다.
그 옆에는 두 명의 행악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비웃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백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3:42)
이 말은 참 낭만적으로 들린다.
‘기억해주세요.’
마치 지나간 연인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처럼.
하지만, 성경에서 ‘기억하다’는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히브리어로 ‘기억하다’는 말은 ‘자카르’(זָכַר).
그것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기억, 은혜를 베푸는 기억, 구원으로 응답하는 기억이다.
라헬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신지라,
그의 태를 여셨다.”(창세기 30:22)
하나님이 라헬을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니다.
라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이다.
요셉도 감옥에서 술 관원장에게 말한다.
“잘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창세기 40:14)
그가 원한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
자유였다. 은혜였다. 구출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 보자.
십자가 옆, 숨이 가쁜 죄수가 예수께 말했다.
“기억해 주소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당신의 나라가 올 때,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소서.”
그리고 예수는 즉시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이 얼마나 신속하고 확실한 은혜인가.
이 얼마나 분명한 응답인가.
‘기억하다’는 것은 ‘살린다’는 뜻이다.
‘잊다’는 것은 ‘버리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탄식한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즉,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레미야도 애통한다.
“주께서 우리를 이같이 오래 잊으시나이까…?”(예레미야애가 5:20)
예수는 말씀하셨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도 잊히지 않는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다.”(누가복음 12:6–7)
우리는 잊힌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분의 기억은 곧 행동하는 사랑이다.
십자가 옆, 마지막 순간.
한 사람은 믿었다.
그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신뢰였다.
그리고 예수는 응답하셨다.
그가 고백한 “기억해 주소서”는
영원한 나라의 입구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자.
“주여, 오늘도 저를 기억해 주소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기억하노라.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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