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기다리는 자세
창세기 16: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녀를 약속하신 1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사래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계절은 바뀔 수록, 희망은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아마도 사래는 매일 같은 질문 앞에 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왜 응답되지 않을까?
내가 하나님께 잘 못한 것이 있을까?
혹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닌, 무언가 해야 하는 걸까?
10년이 지나자, 사래는 결단했습니다.
여종을 통해, 자녀를 얻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당신은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세요.
그녀를 통해서 아이를 얻어야 할 것 같아요.
아브람은 사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브람 역시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람의 첩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갈이 자신의 임신한 사실을 알자,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에게,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드물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래는, 하갈의 멸시를 참았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하갈의 눈빛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사래는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던 하루, 아브람이 사래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당신 표정이 너무 어두워요.
이제 자녀도 생겼는데,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러한 아브람의 반응에,
사래는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습니다.
지금것 하갈에게 내가 당하는 모욕은 당신은 모르셨나요
나는 여종을 당신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나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시길 원합니다.
어쩌면 사래는, 이러한 말을 전하며,
아브람에게 쫓겨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아내된 자에게 자녀는,
그 만큼 중요한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부자에,
가나안의 패권을 쥔 자였습니다.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얻어야 한다며,
자신의 딸, 언니, 누나를
아내로 맞으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이니, 사래는 쫓겨날 각오까지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사래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문화는 여러 부인을 둘 수 있음에도,
자녀가 없음에도, 아브람은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하갈의 문제로
이렇게 아파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아내가 자신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이 상한 아브람이 사래에게 전합니다.
나에게는 10자녀보다 당신이 더 중요합니다.
하갈은 당신의 여종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좋을 대로 교육하시면 됩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변하지 않았던
아브람의 사랑을 확인한 사래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보란듯이 하갈을 엄히 교육했습니다.
하갈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문화로써는 자녀를 얻은 자신이
안주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사래의 교육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하갈은, 그의 자녀를 가진 자신을 외면하는 아브람과
자녀가 없는 사래가, 자신을 학대하는 일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갈은 도망쳤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에서
출산은 얄라드입니다.
얄라드는 단순히 생물학적 출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을 낳는 일, 미래가 열리는 일, 약속이 열매 맺는 일과 연결됩니다.
사래의 고통은 단순히 아이가 없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으로 인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 곳에 있었습니다.
즉 자신으로 인해,
가나안 땅도, 약속된 복도, 전부 사라질 것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안함은, 사래의 오해입니다.
심지어 당시 아브람의 집은
가나안에서 위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불안해 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보이는 현상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현상을 우리를 미혹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해 그 약속을 묵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는 희생을 기꺼히 감내하신,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2절입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에서
얻다는 바나입니다.
바나는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해로, 이 부분을 번역하면
“내 집이 그를 통해 세워질까 하노라.”
즉 사래는 무너진 자기 삶을 하갈의 자녀를 통해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아브람의 가계이 막혔다고 여겼기에,
무엇을 해서든지, 그 집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길을 만들려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가련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대단한 희생처럼 보입니다.
하나님도 감동하실 만한 결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노력과 희생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히 붙갑고,
그 약속 위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아무리 눈물겨운 결단이라도
그 결단이, 하나님의 약속 위에 없다면,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조급함입니다.
4절입니다.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멸시는 업신여기다, 가볍게 여기다, 하찮게 보다라는 뜻 입니다.
하갈은 임신하자 사래를 가볍게 보았습니다.
사래가 가장 원했던 것을 자신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이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사래는 수치를 덮고 싶었습니다.
집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아브람의 미래를 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참으며,
남편에게 하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집은 세워지지 않고,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수치도 덮이지 않고, 오히려 더 해졌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인간의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지키고 싶어서 돈을 붙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더 많이 일합니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준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면,
지키려 했던 가족이 나와 멀어졌습니다.
자녀를 위한 선택이었는데
정작 자녀는 부모의 사랑보다
돈을 좇은 부모의 부재로 인해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이 가진 비극입니다.
마지막으로 6절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학대하다는
괴롭히다, 억누르다, 낮추다, 고통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사래는 상처받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학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선택이 이렇게 무섭니다.
자신은 하갈에게 선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선이, 악으로 돌아오자,
이제 사래는 악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 중심의 선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선을 좇아야 합니다.
물론 지혜가 부족한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대방 입장에서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브람의 문화를 몰랐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하갈 입장에서는
늙은 아브람에게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더니, 자녀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또 사래는 하갈의 배 속에 있는 자녀를
마치 자기 자녀인냥, 온갖 간섭을 합니다.
자신의 배 안에 있는 자녀인데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래를 무시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이러한 일은 애굽에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자녀도 없는 사래의 학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하갈의 도망은 단순한 이동이 아닙니다.
견딜 수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몸부림입니다.
사랑받아야 할 자리가 고통이 되고,
머물러야 할 집이 숨 막히는 곳이 되면
사람은 결국 도망하게 됩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하나님 없이 해결하려던 일이
사람 하나를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하갈의 이름 뜻이 방랑자, 도망자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결국 하갈이 아니라 사래를 통해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비극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약속을 이루려 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본문이, 우리의 삶과 이어지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더딜 때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 받은 마음 같은데,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왜 아직입니까.
언제입니까.
정말 기다리기만 해야 합니까.
하지만,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시간에, 그 약속의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전장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양을 치는 것입니다.
형들은 나라를 위해 군사 훈련을 받고,
대적과 싸우는 전장에 참전하는데,
자신은 들에서 양을 치며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든지 조급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투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과
주어진 상황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 했습니다.
성실히 양을 지켰고,
이를 위해 물매를 익혔고,
또 휴식 시간에는
성경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들판이
하나님이 다윗을 준비시켰던 시간이며, 학교였습니다.
기다림이고, 조급할 수 있는 시간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와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를 쓰러트렸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었고,
여전히 전장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자
다윗에게 그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총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이 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 약속 위에서 자기 위치를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그곳에 노예의 자리이고, 죄인의 자리라도
그는 약속 위에서 하나님과 교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할 수 있는 그 시간에,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갔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노예이자, 죄수인 요셉을
한 순간 총리의 시험대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보란듯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약속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약속을 기다리는 자세는
시간을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 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은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늘 내게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약속 위에서
내가 주어진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내가 확실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늦은 것이 아닙니다.
버려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개치 않으십니다.
기다리는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계산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서 허락하신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그 기다림의 자리에서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버려진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속에 걸 맞게 빚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우리를 빚으신 후에,
약속에 걸맞는 사람으로
정금 같이 나아가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기다림이 길어질 때 우리의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방법으로 약속을 이루려 하지 말고, 주의 때와 주의 길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게 하시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마침내 주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결과보다 그동안 우리를 붙드신 주님의 신실하심에 찬양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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