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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늘(주간 메시지)

창세기 5:1-17 죽어야 사는 길

by 셀라지기 2025. 10. 6.

죽어야 사는 길

 

죽어야 사는 길

창세기 5:1-17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성경을 읽다가, 그냥 건너뛰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 이름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보가 등장합니다. 

아담에 족보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4장의 가인의 족보에는 죽었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인의 족보에는 화려한 문명과 문화를 이룬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의 족보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죽었더라를 반복하여 기록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인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דְּמוּת, demut)대로 지으셨다.”

 

모양으로 번역된 demut는 ‘닮음, 유사함’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모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다릅니다.

“아담은 자기의 모양과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원죄 이후,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죄로 변질된 그 아담의 형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 즉, 처음부터 잘 못된 길로 출발하게 된 것이, 원죄 이후의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참으로 불공평합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부족하고,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 보겠습니까?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죄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산 소망이 되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이름 몇이 있습니다. 

그 중 첫번째는 에노스(אֱנוֹשׁ)입니다.
‘연약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26은 말씀했습니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이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내가 강하고 잘나갈 때가 아니라, 

내 연약함을 깨닫 것나, 죽음을 직면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다면, 

어느새 가인의 계보에 들어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칫 자신을 믿는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하심이 

가득한 천국의 삶을 다시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처음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죽었더라(וַיָּמֹת, vayyāmot).

 

히브리어 바이야모트는 단순한 죽음의 사실을 넘어,

‘끝이 났다, 닫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이 죽었더라로 닫힌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그 어떤 업적, 이름, 문명도 결국은 이 한 마디로 마감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레니즘 문명을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은

엄청난 크기의 영토를 점령한 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1. 내 관을 의사들이 메게 하라. (의사도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2. 내 재물을 길에 뿌리라. (죽음 앞에서 재물이 소용없다는 의미입니다.)
  3. 내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밀게 하라.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처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라 일컬어지는 알렉산더도

결국 죽었더라라는 한 마디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죽었더라로 닫힌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아닌, 그 이후의 삶을 바라봐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삶이 시작될 이유가 없습니다. 

태어나 그냥 죽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이 그 목적이 있어 만들어졌듯이,

우리의 삶에는, 아들의 생명으로,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부터 죽음 너머에 대한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씨앗이 죽어야 꽃이 핍니다. 꽃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죽을 때, 그 안에 수많은 씨앗이 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인해 허망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꽃이 될 천국을 향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이땅의 삶을 통해 결실한 많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죽지 않기 위해, 세상과 싸워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죽이고, 

그 말씀을 좇아 세상을 살아감으로 

세상의 참 주인이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렵고, 안될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의 노력과 지혜로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요셉, 다윗, 다니엘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셉의 시대에, 다른 노예들과 같이 살지 말고,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라!

 

이것이 염려와 걱정하는 나를 부인하고, 

말씀을 좇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를 도전합니다.
가인의 족보가 아닌, 아담의 족보와 같이 죽어야 산다. 

그러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그럴 때 우리의 결론이 죽었더라를 너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았더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내 계획과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나는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는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아담의 계보를 통해 ‘죽었더라’임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업적과 문명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 너머의 생명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걱정이 아닌, 두려움 없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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