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하며 삽니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물으면, 대답은 모호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가르침이 있고, 저마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칩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 진리가 되는 오직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인 토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토라를 오해해 왔습니다. 그저 “율법”이라는 낡은 단어로 치환해 버렸습니다. 구약은 죄와 형벌의 기록, 신약은 은혜의 기록이라는 이분법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가장 본질적인 뿌리를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이 뿌리를 다시 붙들어야 할 이유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토라의 본래 이름은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어 ‘야라’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과녁에 화살을 맞추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표적을 정확히 겨냥하도록 돕는 것이 토라의 목적입니다. 그 과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토라를 규칙의 집합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토라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길로 걸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지침”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지 않고 따라가듯, 인간은 이 지침에 순종함으로써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토라’가 헬라어 ‘노모스’로 번역되면서 생겼습니다. 노모스는 본디 다양한 뜻을 가졌습니다. ‘관습’, ‘원리’, ‘법령’, ‘종교법’, ‘율법주의’까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 단어는 오직 ‘율법’ 하나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토라를 하나님과 관계없는 형식적 규칙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와 시편이 나에 대하여 증언한다.” (누가복음 24장) 그분에게 토라는 구약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그분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알라, 나를 사랑하라, 내 가르침에 거하라.” 그 모든 이야기가 처음으로 발화된 자리, 그것이 시내산이며, 거기에서 토라가 주어졌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언제나 같은 외침을 던졌습니다. “너희는 토라로 돌아가라.” 시편은 이 가르침을 노래했고, 예언서는 그 가르침을 떠난 자들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토라의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토라란 무엇입니까? 토라는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가르침의 집입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은혜와 대립하는 옛 문서가 아닙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 길로 오라”고 손짓하시는 영원한 초대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가?”
토라를 알지 못한 채 신앙을 말한다면, 마치 기초 없는 집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 거짓 선지자들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것이 어디에 뿌리를 둔 지를 모른다면, 언제든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길을 보여주시는 스승이십니다. 토라는 그 길을 밝히 드러내는 빛입니다. 그래서 토라는 우리 삶의 과녁을 맞추도록 돕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결코 토라를 부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토라에 뿌리내리고, 그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성하는 신앙입니다.
다시 토라로 돌아오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 길이 곧 생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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