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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히브리어 이해 1 토라, 과녁에 맞추는 삶에 대하여

by 셀라지기 2025. 7. 3.

토라, 과녁에 맞추는 삶에 대하여

 

우리는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하며 삽니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물으면, 대답은 모호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가르침이 있고, 저마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칩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 진리가 되는 오직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인 토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토라를 오해해 왔습니다. 그저 “율법”이라는 낡은 단어로 치환해 버렸습니다. 구약은 죄와 형벌의 기록, 신약은 은혜의 기록이라는 이분법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가장 본질적인 뿌리를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이 뿌리를 다시 붙들어야 할 이유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토라의 본래 이름은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어 ‘야라’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과녁에 화살을 맞추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표적을 정확히 겨냥하도록 돕는 것이 토라의 목적입니다. 그 과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토라를 규칙의 집합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토라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길로 걸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지침”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지 않고 따라가듯, 인간은 이 지침에 순종함으로써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토라’가 헬라어 ‘노모스’로 번역되면서 생겼습니다. 노모스는 본디 다양한 뜻을 가졌습니다. ‘관습’, ‘원리’, ‘법령’, ‘종교법’, ‘율법주의’까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 단어는 오직 ‘율법’ 하나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토라를 하나님과 관계없는 형식적 규칙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와 시편이 나에 대하여 증언한다.” (누가복음 24장) 그분에게 토라는 구약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그분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알라, 나를 사랑하라, 내 가르침에 거하라.” 그 모든 이야기가 처음으로 발화된 자리, 그것이 시내산이며, 거기에서 토라가 주어졌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언제나 같은 외침을 던졌습니다. “너희는 토라로 돌아가라.” 시편은 이 가르침을 노래했고, 예언서는 그 가르침을 떠난 자들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토라의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토라란 무엇입니까? 토라는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가르침의 집입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은혜와 대립하는 옛 문서가 아닙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 길로 오라”고 손짓하시는 영원한 초대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가?”

토라를 알지 못한 채 신앙을 말한다면, 마치 기초 없는 집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 거짓 선지자들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것이 어디에 뿌리를 둔 지를 모른다면, 언제든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길을 보여주시는 스승이십니다. 토라는 그 길을 밝히 드러내는 빛입니다. 그래서 토라는 우리 삶의 과녁을 맞추도록 돕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결코 토라를 부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토라에 뿌리내리고, 그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성하는 신앙입니다.

 

다시 토라로 돌아오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 길이 곧 생명의 길이다.”

히브리어 문자 뜻

 

히브리어 숫자

 

참고 싸이트

https://www.hebrew4christians.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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